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문단 편집) == 과정 ==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1661~[[1700년]])가 후사없이 병으로 위중해지자 후계자로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인 [[펠리페 5세|앙주 공작 필리프]]와 셋째 손자인 베리 공작 샤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 6세|카를 대공]],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 마르가레타 테레사([[카를로스 2세]]의 친누나, 이미 사망)와 [[레오폴트 1세]]의 외손자로 [[카를 6세]]의 외조카이다. 요제프 페르디난트의 어머니 마리아 안토니아는 [[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결혼한 후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낳고 죽었다.]가 선상에 올랐다. 왜 후계자 후보가 네 명이나 되었냐면, 제1계승권자는 카를로스 2세의 외조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1669~1692, 바이에른 선제후비)였으나 그녀가 산후 후유증으로 갓난아기인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남기고 일찍 사망한 뒤 남은 후계자 후보들이 모두 모계 계승권자[* 다만, 카를 대공의 경우 부계로도 계승권이 있으나, 부계 계승권자로서는 촌수가 상당히 멀었고, 실제로 촌수와 항렬로 따지면 가장 후순위 후보였다. 그 대신 카를 대공의 경우 세 후보 중 유일하게 스페인 왕가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인지라 논란이 생긴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루이 14세]]와 [[레오폴트 1세]]의 패권 야욕을 잘 알았고, 카를로스의 조카손자인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왕위에 올려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줄이기로 했다. [[9년 전쟁]]으로 프랑스 경제가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루이 14세는 또다른 전쟁으로 인한 경제 파탄을 막기 위해 이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 양보를 하기로 결정했다. 1698년 초에 루이 14세는 프랑스 왕족이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고 해외 식민지 또한 계승한다는 조건 하에 스페인령 이탈리아 전체를 카를 대공에게 양도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바이에른에 넘기며 스페인 해외 식민지 무역권을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에게 넘기겠다는 제안을 윌리엄 3세에게 보냈으나 윌리엄은 이 제안이 프랑스에 지나치게 유리하다며 거부했다.[* 황당하게도 윌리엄이 거부한 이 제안은 훗날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거의 유사하게 실현된다.] 제안이 거부당하자 루이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에게 스페인 왕위를 준다는 것이었고 이 제안에 윌리엄은 동의했다. 1698년 말에 잉글랜드-네덜란드와의 헤이그 조약을 체결하면서 마침내 합의를 보았다. * 헤이그 조약(1698년 10월 11일 체결) * 요제프 페르디난트의 차기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며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와 스페인령 네덜란드 역시 그대로 보유한다. * 프랑스는 바스크 지방의 기푸스코아와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을 가진다. * 오스트리아는 밀라노 공국을 가진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스페인의 영토 분할에 강한 반감을 표했고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스페인 왕위 단독 계승자로 지목한 뒤 타 국가들에 의한 자국의 영토 분할 논의를 모조리 무시해버린다. 그런데 [[1699년]]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7살의 나이로 [[천연두]]로 병사(일각에서는 의문사를 제기함)하는 사고가 터지면서 이제 누가 스페인 왕위 계승자가 되느냐를 두고 다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루이 14세는 1700년 런던 조약으로 잉글랜드-네덜란드와 두번째 합의를 보았다. * 런던 조약(1700년 3월 24일 체결) * 카를 대공을 차기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며 헤이그 조약 그대로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와 스페인령 네덜란드 역시 그대로 보유한다. * 프랑스는 기푸스코아와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을 가진다. * 대신 프랑스는 밀라노를 신성 로마 제국의 로렌 공국과 교환하거나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사보이아 공국의 사보이아 및 니차와 교환하는 강제옵션을 가진다. 이 조약의 내용을 전해들은 카를로스 2세는 자국 영토만 갈라먹으려 드는 프랑스를 배제하고 같은 가문인 카를 대공을 후계자로 정하려고 했으나 같은 가문이랍시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만 편들었다가 온갖 험한 꼴을 다 본 뒤[* 당장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 참전한 9년 전쟁에서도 경제가 파탄나 1692년 파산을 선언해야 할 지경이었다.] 정나미가 떨어진 카스티야 귀족들이 앙주 공작을 지지하여 카를로스를 설득했고 또 당시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를 열심히 들쑤시고 다니던 잉글랜드-네덜란드 해군 때문에 잉글랜드-네덜란드의 라이벌인 [[프랑스 해군]] 정도면 충분히 스페인 해외 식민지를 보호해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1700년 10월 2일 앙주 공작 필리프를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지정하며 스페인의 분할을 시도할 시 왕위 계승이 취소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남기고 한 달만인 11월 1일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로 즉위한다. 카를로스의 유언을 들은 루이 14세는 이 유언을 수락하는 순간 100% 전쟁 확정이었기 때문에 수락을 망설였으나 왕세자인 [[그랑 도팽 루이]]가 자신의 아들에게 스페인 왕위가 돌아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그랑 도팽의 뜻을 감안하여 유언을 수락하기로 결정한다. 애초에 카를로스의 유언장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통합이 금지되어야 스페인 국왕이 된다고 명시해 놓았기 때문에 프랑스와 스페인이 통합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스페인 왕위를 요구하는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해양세력 네덜란드와 잉글랜드는 참전을 망설였다. 루이 14세 역시 카를로스의 유언 수락은 그저 왕조와 자신의 손자를 위한 것이며 예전부터 루이 14세가 스페인의 알짜배기 영토인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를 노렸음을 감안할 때 루이가 유언을 수락하면서 스페인의 영토 분할 금지에 동의한 것은 오히려 자신의 영토적 야심을 포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후 루이 14세의 조심성 없는 행동이 사단을 일으켰다.''' 우선 루이 14세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동시 왕위 계승을 금지한 카를로스의 유언을 무시하고 펠리페 5세를 프랑스 왕위 상속이 가능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전 유럽이 프랑스가 혹시 스페인을 통합하는게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 루이 14세는 두 나라를 통합할 마음이 전혀 없었고 만약에 왕세자 [[그랑 도팽 루이]]와 왕세손 [[프티 도팽 루이]]가 모두 죽는 참사가 발생했을 경우[* 그리고 이 우려는 두 사람 다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1년 간격으로 연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현실이 되었다. 맏증손자 브르타뉴 공작 루이도 이때 죽었지만 둘째 증손자 [[루이 15세]]가 있었기에 프랑스 왕실의 대가 끊기는 참사는 피했다.]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고 프랑스 왕이 되게 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였으나 문제는 루이가 미쳤는지 이걸 프랑스 내에서만 알리고 잉글랜드, 네덜란드에게는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양세력의 의심은 더더욱 커져갔다. 여기에 루이 14세는 펠리페 5세에게 당시 스페인의 호수라고 할 수 있는 [[카리브 해]]에서 독점적으로 노예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인 아시엔토(Asiento)를 달라고 했고 이것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상인들을 격노하게 만들었다. 또한 루이 14세는 프랑스-네덜란드 국경에 세워진 요새선에서 [[네덜란드인]]을 추방시키고 [[프랑스군]]을 채워넣었다. 여기에 더해 루이 14세는 [[명예혁명]]으로 쫓겨난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인정해버리는 대형사고를 쳤고 결국 두 해양세력은 루이 14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정작 루이 14세는 선전포고 소식을 받아들고 매우 당황했는데 자신은 프랑스와 스페인을 통합할 마음이 없는데 잉글랜드-네덜란드와의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앞선 루이 14세의 조심성 없는 행동은 도저히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앙주 공작 필리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카를 대공이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앞서 언급했듯이 루이 14세의 조심성 없는 행동으로 프랑스에게 적대적으로 변한 잉글랜드-네덜란드, 루이 14세의 지속적인 확장 야욕을 경계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스페인과 앙숙이자 잉글랜드와 오랜 동맹관계인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스페인에서 독립하려는 [[카탈루냐]], 프랑스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사보이아 공국]][* 원래 사보이아 공국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처가가 [[부르봉 왕가]]여서 초창기에는 프랑스 편을 들어 참전했으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6촌인 [[사부아 공자 외젠]]이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오자 프랑스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 편으로 이탈했다.]이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 참전하였다. 한편 프랑스-스페인 측에는 스페인 왕국 산하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이 참전했고, 합스부르크에서 분리를 시도했던 [[헝가리 왕국|헝가리]][* 단, 헝가리 왕국을 독립시키려던 [[라코치 페렌츠 2세]]가 이끄는 쿠루츠 봉기군 한정이었고, 실제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지했다.], 합스부르크가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했던 [[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 [[쾰른 선제후국|쾰른]][* 당시 쾰른 선제후를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숙질계승으로 준 세습하고있었다.], [[리에주]] 주교령 등이 가세했다. 여러 나라가 참전하면서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반(反) 프랑스-스페인 동맹에서는 잉글랜드가 해전에서 절대 우위를 보이며 프랑스의 무역과 식민지를 위협하여 프랑스에 강한 압박을 가했다. 국제적으로 프랑스를 압박하여 빠르게 굴복시키고 루이 14세의 팽창을 막고자 한 것이다. [[블레넘 전투|블렌하임]], [[라미예 전투|라미예]], [[토리노 공방전|토리노]], [[오우데나르데 전투|오우데나르데]] 등 주요 전투에서 참패한 프랑스는 대기근까지 들어 스페인 왕위를 포기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동맹국은 루이가 이때까지 정복한 영토들을 거의 다 반환하라고 했고 프랑스는 여기에 동의하였으나 루이가 자신의 손자를 몰아내라는 모욕적인 요구에 협상을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동맹군은 파리를 노렸으나 프랑스의 요새망에 걸려 좀처럼 파리로 가지 못했다. 여기에 전황을 반전시킨 세 가지의 일들이 있었다. 먼저, 인구가 많은 카스티야 귀족들이 펠리페 5세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를 대공이 점차 밀리게 된 데다가 마드리드를 카를 대공이 점령한 뒤 무책임한 후속 조치로 카스티야인들의 반감이 더 심해져 마드리드를 도로 내줘야 했고 방돔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증원군이 도착해 스페인군과 함께 동맹군을 브리우에가에서 격파하며 이베리아 반도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쥐었고 결국 합스부르크가 스페인을 되찾기 힘들다고 판단한 영국이 브리우에가 전투 이후 프랑스와 단독협상에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로 휘그당이 1710년 선거에서 참패하고 전쟁을 끝내려는 토리당이 집권했다. 토리당은 네덜란드가 전쟁에서 플랑드르를 사실상 지배하고 해외 무역에서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한데다가 유럽 전쟁에 열성적인 휘그당과 달리 토리당은 해외 무역과 카를 대공이 카탈루냐만 차지하고 있는 것에 중점을 두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1710년 말부터 종결하려고 시도했다. 마지막으로 1711년 4월에 요제프 1세가 사망해서 영국이 협상에 나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 많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미 1710년 말부터 협상은 시작되었고 요제프의 사망은 그저 이미 협상을 시작한 영국을 더욱 더 평화로 모는 자극제가 되었을 뿐이다. 토리당은 프랑스에게 스페인 왕위 계승을 지지하는 대가로 스페인과 프랑스가 이후에 하나의 왕이 다스리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할 것과 수익성 있는 해외 식민지를 받기를 원했고 프랑스는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협상 중 충격적인 일들이 일어났다. 1711년 왕세자 루이가 사망하고 이듬해 왕세손 루이마저 죽자 펠리페 5세가 프랑스 왕위에 오를 확률이 높아졌고 영국과 프랑스는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으로 남고 프랑스 왕위를 영구적으로 포기하거나 스페인 왕위를 사보이아 공작에게 넘기고 펠리페는 사보이아를 다스리다 왕세손 루이의 아들 루이가 죽을 경우 사보이아를 프랑스에 합병함과 동시에 펠리페가 프랑스 왕이 되도록 하는 안을 펠리페에게 보냈다. 펠리페는 자신의 프랑스에 대한 권리가 포기되는 것에 분노했으나 어쩔 수 없이 조약에 서명했다. 그리고 펠리페는 스페인 왕으로 남는 안을 선택했다. 그러나 위트레흐트 조약에 서명한 뒤에도 프랑스의 왕이 되려는 펠리페의 욕심은 끝나지 않았고 결국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모두 같은 편으로 만드는 [[사국 동맹 전쟁]]을 일으킨다. 영국의 단독협상 중에 프랑스 북부 전선은 붕괴 위기였다. 말버러 공이 파리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버러 공은 토리당과 앤 여왕에 의해 실각했고 영국군은 이탈했다. 그러나 에우제니오 공이 이끄는 동맹군은 다시 파리를 위협했고 파리가 위태로워지자 루이 14세는 빌라르 원수에게 일이 틀어지면 자신이 직접 싸우다 죽겠노라고 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드냉의 기적으로 부르는 드냉 전투가 일어났고 빌라르 원수는 대승을 거두었다. 드냉의 기적으로 프랑스는 북부 전선에서 다시 우세를 점했고 손실이 너무 컸던 네덜란드는 전쟁에서 이탈하기로 결정했다.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도 평화를 원하면서 프랑스와 스페인은 길고 긴 전쟁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